본문 바로가기

news 명장 김중수 ‘영욕( 榮辱)의 시간’ 제2편

페이지 정보

작성자배드민턴코리아 댓글 0건 작성일 2011-04-27 18:27

본문

명장 김중수 ‘영욕( 榮辱)의 시간’
제2편. 뜨거웠던 2002부산아시안게임

국가대표 감독으로 첫발을 내딛다
국가대표팀 감독, 선수로 시작해 마지막으로 꿈꿔보는 자리다. 대표팀 코치로 꼬박 10년을 채웠고 결국 그 자리에 올랐다. 김중수 감독은 2001년 국가대표팀 수장이 된다. 당시는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다. 세대교체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의 성적이 초라했다. 게다가 1년 후인 2002년에는 부산아시안게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1년 안에 무언가를 만들어내야만 했다. 감독으로서 첫 번째 시험무대였다. 망설이고 있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김 감독은 변화를 단행한다.

“한 종목에 치중하기보다는 전 종목에서 메달을 딸 수 있도록 틀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다른 종목들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때만 하더라도 한국은 복식에 집중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김동문, 라경민에 의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 감독은 단식 종목에 많은 코치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장기적으로 바라본 것이다. 또한 지난날 코치로 지내며 생각해왔던 것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선수들에게 너무 강압적으로 하지 않으려했다. 잡을 때는 잡고, 풀어줄 때는 풀어주는 강약조절을 하려고 노력했다. 감독과 선수 간에는 거리를 두더라도, 코치와 선수 간에는 거리감이 없도록 지시했다.”

김중수 감독이 사령탑이 된 2001년 여름철대회 이후부터, 대표팀의 훈련량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당시 2001년 뜨거운 여름을 함께한 국가대표팀 주축은 김동문, 하태권, 유용성, 이동수, 이현일, 손승모, 라경민, 정재희, 이경원, 이효정 등이었다. 이들은 1년 후인 2002년 대형사고의 중심에 선다.
김중수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코치로 생활하면서도 대표팀 살림을 도맡아 했지만, 감독이 되고나서 이렇게 큰 식구들을 어떻게 이끌고 가야할지 큰 걱정이었다. 솔직히 성적에 대한 부담감도 컸다.”


역대 최고의 아시안게임, 2002부산
시간은 살같이 지나가 2002년이 됐다. 그해 여름, 한국은 꽤나 떠들썩했다. 2002월드컵 때문이다. 월드컵은 태릉선수촌도 한바탕 술렁이게 했다. 축구대표팀의 포상금, 훈련수당, 특급호텔 이용, 병역 혜택, 체육훈장 등등. 모든 것이 선수촌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 넘었다. 당시 태릉선수촌의 훈련수당은 일당 5천원, 축구 대표팀은 일당 15만원이었다. 올림픽 3위 이상, 아시안게임 1위에게 주어지는 병역혜택도 월드컵16강 앞에서 무너져버렸다. 상대적 박탈감은 이로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감독은 멈출 수 없었다. 코앞에 부산아시안게임이 있었다. 국가대표팀은 2002년 10월 1일 새마을호를 이용해 일찌감치 부산으로 향한다. 경기는 6일부터였다. 목표는 금메달 2개였다. 혼합복식과 남자복식. 뚜껑을 열었을 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한국 배드민턴은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사상 최고의 축제를 벌인다. 눈부셨다. 전 종목에서 메달을 휩쓸었다.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를 기록해 역대 아시안게임 중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가장 먼저 금메달이 나온 것은 남자단체전이었다. 한국 남자대표팀은 세계 최강이라 평가받던 인도네시아를 결승에서 제압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1994년부터 토마스컵(세계남자단체선수권대회)에서 연속 5회 우승을 차지했고, 1998방콕아시안게임 챔피언이었다. 한국 남자대표팀에게는 1986서울아시안게임 이후 16년만의 우승이었다. 김중수 감독에게도 그 우승은 특별했다. 16년 전 단체전 우승의 주역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 감독은 인터뷰에서 “선수와 지도자로 각각 우승한 것은 천운이다. 체력을 중점적으로 키운 것이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한국 대 인도네시아의 남자단체전 결승전에서는 약 2시간동안 경기가 중단되는 최악의 판정 시비가 있었다. 타우픽 히다얏이 주인공이었다. 상대는 손승모, 첫 번째 남자단식 대결이었다. 1게임을 챙기고 2게임도 손승모가 12-9
로 앞서고 있었다. 그때 타우픽은 라인저지의 판정에 항의했고, 급기야 경기를 중단하고 퇴장해 버렸다. 결국 문제의 포인트를 무효로 처리하고 2시간 후 경기가 속개될 수 있었다. 페이스를 잃은 손승모는 2게임을 13-15로 내주고 만다. 이어진 파이널게임, 피말리는 접전 끝에 17-16의 스코어로 손승모는 승리를 챙겨낸다. 투혼이었다. 승기를 잡은 한국은 2번 단식 이현일 승, 1번 복식 이동수-유용성 패, 2번 복식 김동문-하태권 승으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참고로 타우픽은 남자단체전에 이어 이현일과의 남자단식 결승전에서도 또다시 판정시비를 걸어 2분여간 경기를 중단시켰다. 그 후 2006코리아오픈에서 한 번 더 판정에 항의했고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2011코리아오픈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단체전 금메달에 이어 기대했던 세계최강의 혼합복식 김동문-라경민 조가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했다. 결승전은 퍼펙트게임으로 (11-4, 11-0) 15분짜리 압도적인 경기였다.

한국은 1986서울아시안게임부터 혼합복식 5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김 감독의 아시아게임 목표는 일찌감치 달성된 셈이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여자복식에서 라경민-이경원 조가 결승전 80여분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금메달을 추가했고, 남자복식에서 이동수-유용성 조가 피날레를 장식했다. 한국 여자복식은 1994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장혜옥-심은정 조 이후 8년 만에 금메달이었다. 라경민은 대회 2관왕에 올랐다. 남자복식은 1986서울아시안게임 박주봉-김문수 조 이후 16년 만이었다. 기대를 모았던 김동문-하태권 조는 4강에서 고배를 마셨다.

한편, 부산아시안게임 뒤풀이는 2003년 1월 2일에서 열렸다. 대한배드민턴협회는 경기도 광명시 다이아나호텔 축하연에서 코칭스태프 5명을 포함한 25명의 국가대표팀에 5천만원의 포상금을 전달했다. 포상금은 김 감독의 제의대로 성적에 관계없이 1인당 200만원씩 지급됐다.

재목을 고르는 남다른 안목
김중수 감독은 부산아시안게임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첫 번째 테스트를 멋지게 패스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중에는 예상치 못한 메달도 있었다. 바로 라경민-이경원 조의 여자복식 금메달이다. 당시 여자복식은 중국과 인도네시아가 워낙 강해 메달을 기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 감독의 작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출전 선수를 정하고, 복식조를 결정하는 것은 감독의 고유권한이다. 이경원은 원래 단식 선수였다. 김 감독의 눈에는 복식에 적합했고, 결국 이경원은 복식 선수가 됐다. 라경민도 마찬가지다. 단복식을 모두 뛰었으나 김 감독의 권유대로 복식에만 전념하게 됐다. 김동문도 단식 선수였으나 복식으로 전향했다. 이용대도 단복식을 모두 뛰었으나 복식에 전념하게 했다.

“단식에는 단식의 기량이 있고, 복식에는 복식에 맞는 기량이 있다. 파워와 스피드가 좋으면 복식. 스트로크게임, 정교함, 세심한 선수들은 단식이 적합하다.”
“복식조는 서로의 밸런스를 보고 결정한다. 한명은 네트, 한명은 후위 이런 식이다. 가능하면 선후배로 묶어주는데, 선후배로 한조를 묶으면 서로 이해를 잘 해주고 잘 따른다. 대표팀에 들어올 정도면 다 잘난 선수들이다. 서로 으르렁 거리다 망치기도 한다. 김동문-하태권, 이동수-유용성 조 같은 경우에는 동갑내기라 처음에는 떼어놓으려 했었는데 워낙 잘 맞아서 그냥 두었다.”

지난 2010광저우아시안게임 신백철-이효정 조도 코칭스태프들의 조언을 감안한 김 감독의 걸작이었다.
“이용대가 팔꿈치 문제도 있고 두 종목을 뛴다는 것이 오히려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자복식에 전념하게 했던 것이다. 그동안 정재성-이용대 조가 큰 대회에서 집중을 못한 것도 있었다. 또 이용대-이효정 조는 모든 사람들이 큰 기대를 건다. 부담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오히려 파트너가 안되면 각자의 경기를 홀가분하게 뛸 수 있다. 또 신백철은 지난해 초 유럽시합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 용대보다 파워도 좋아 효정이가 쉽게 뛸 수 있겠다 생각했다.”

김중수 감독은 1986서울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은퇴 후 주니어대표팀 코치로, 이어 국가대표팀 코치로 10년간 활동했다. 그 후 2010년 12월까지 10년간 국가대표팀 수장으로 2002부산아시안게임, 2004아테네올림픽, 2006도하아시안게임, 2008베이징올림픽,2010광저우아시안게임과 각종 국제대회들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명장이다.


심현섭 기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