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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배드민턴 황제 김동문, 대학 강단에서 인생2막(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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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드민턴코리아 댓글 0건 작성일 2012-04-1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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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틀콕 황제
대학교 강단에서 인생 2막
김동문 원광대 교수
‘그’ 김동문이 ‘교수님’이 됐다. 원광대학교 스포츠과학부 사회체육학 전임교수다. 김동문 교수는 지난 3월 초부터 강단에 섰다. 학교에 적응도 해야 하고, 강의도 준비해야 하고, 수업 끝나면 학생들에게 사인도 해줘야 하고, 연구도 해야 하고, 인터뷰도 해야 하고, 배드민턴 중계방송 해설도 해야 하고, 김동문국제배드민턴아카데미도 운영해야 하고, 원광대 배드민턴부 코치로도 활동해야 하는 김 교수는 지금 매우 바쁘다.
지난 3월 15일 전라북도 익산시에 위치한 원광대학교를 찾았다.(안타깝게도 “학생들 미래설계에 도움 주는 교수가 될 터”라는 큼지막한 제목의 인터뷰가 실린 학교신문이 교내 여기저기에 뿌려진 뒤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그의 연구실에는 지인들이 보내준 교수 임용을 축하하는 꽃과 난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나는 교수다
김동문 교수는 원광대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석, 박사를 마쳤다. 2006년 운동생리학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곧장 캐나다 유학길에 올랐다. 그 후 간간이 국내에 모습을 비추다 2011년 9월 캐나다 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했다.

교수님이라는 호칭에는 익숙해졌나요?
교내에서는 괜찮아졌는데요. 아직 밖에서는 조금 어색하네요. 하하하.

임용되기 전에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작년 10월 1일부로 발령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했는데 최종 이사회에서 보류로 결정이 나면서 몇 개월 동안 마음고생을 조금 했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결정이 조금 어려웠습니다. 거기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상태였거든요. 특히 3년 가까이
영주권 문제 때문에 애를 먹었고, 그리고 (김동문국제배드민턴)아카데미도 자리를 잡은 상태였기 때문에 결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미래도 고민을 했고요. 솔직히 아쉽고, 조금 아깝기도 했어요.

어떻게 결정을 내렸나요?
와이프(라경민 대교눈높이 감독)가 캐나다에서 어린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었지만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싶어 했어요. 그러던 중에 와이프에게 감독 제의가 왔고, 그러면서 방향을 조금씩 바꾸게 됐어요. 그동안 저희가 받았던 지원과 사랑만큼 한국 배드민턴 발전과 후배들 그리고 꿈나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항상 잊지 않고 있었거든요. 한편으로는 아이들 교육을 캐나다에서 시키고 싶기도 했는데, 나중에 다시 선택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어요. 한울이 한비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아직은 아빠 엄마가 해야 될 일이 더 많아서 아이들 교육 문제는 약간 뒤로 미뤄두고 언제든지 필요하다 느낄 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결정을 내리게 됐죠.

캐나다 생활은 어땠나요?
처음에는 대한체육회에서 시행하는 스포츠외교인력양성 프로그램에 선발돼서 1년간 어학연수를 떠났어요. 처음부터 3년에서 5년 계획으로 떠났기 때문에 2년차부터는 자비로 모든 걸 해결했었죠. 처음 1년간은 랭귀지스쿨에 다녔어요. 은퇴하고 바로 떠난 유학이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는데 영어 실력이 바닥이라 창피하기도 해서 열심히 영어 공부만 했죠. 그러다가 아이들에게 배드민턴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영어에 자신감이 붙으면서 배드민턴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캐나다 국가대표, 주니어 국가대표 선수들을 지도하게 됐던 거예요. 5년 9개월 정도를 그곳에 머물렀네요. 외국에서 배드민턴 지도자 생활을 하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영어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고 영어만 잘하면 앞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한국에 오고 싶지는 않던가요?
처음에는 한국에 오고 싶었죠. 그러다가 아이들 한울이, 한비가 태어나면서 그곳에 완전히 적응했고 괜찮아졌습니다. 사실 친구들도 그립고 한국의 빠르고 편리한 생활문화가 굉장히 그리웠죠. 그런데 마당에 잔디 깎고 꽃도 심으면서 집을 가꾸는 일,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스테이크를 굽는 일들이 제게는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 처음에는 고기 굽는 것이 서툴렀는데 나중에는 ‘바비큐 마스터’라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로였죠. 하하하.

캐나다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뭔가요?
학생비자로 가서 워킹비자를 거쳐 영주권을 받았는데, 비자를 연장하기가 가장 어려웠어요. 그리고 캐나다는 교육비와 의료비가 전액 정부에서 지원을 해줍니다. 그런데 병원에 가서 일반 진료를 하더라도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장난 아니게 길었어요. MRI 검사라도 하려면 최소 3개월에서 6개월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하죠. 성격 급하고 빨리빨리 모든 것이 해결돼야 하는 한국 사람에게는 인내심이 필요해요. 뭐 이런저런 문화적인 차이들이 조금 힘들었죠.

임용 직전에 학교가 부실대학으로 지목되기도 했습니다.(원광대는 지난해 9월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정부재정지원 제한, 학자금대출 제한 대학으로 지목됐으나 이를 극복하고 같은 해 12월 교육과학기술부의 부실대학 발표에서 제외됐다)
저는 학교에 구조조정이 이뤄질 거라 생각했어요. 교수 임용도 감축될 것 같았고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학교에서 교수 충원률을 더 높이고, 오히려 학생 수(신입생)를 줄여서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어요. 교과부에서 대학들을 평가할 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졸업생 취업률이잖아요. 교육의 질이 향상되면 자동적으로 취업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부실대학의 오명을 벗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모든 구성원들이 열심히 뛰고 있어요. 원광대학교는 내부적으로 굉장히 탄탄한 대학이에요. 앞으로 많은 변화가 있을 겁니다. 지켜봐 주세요.

원래 꿈이 교수였나요?
어릴 때부터 꿈이 교수였어요. 살다보니 바뀌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됐네요. 사실 교수가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명예직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소속이 생기면 얽매여야하고. 그런 점에서 조금 망설이기도 했어요. 캐나다에서 굉장히 자유로운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여유로운 시간도 많았고 가족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거든요. 집에 오면 와이프랑 같이 저녁 준비하고, 아이들 챙기고, 청소하고, 마당에 잔디 깎고, 꽃 심고, 겨울에는 눈 치우고. 그만큼 여유롭게 가족들과 함께 했었습니다. 캐나다에 있으면서 캐네디언들이 즐기는 요리도 많이 배웠어요.

지도자가 되고 싶었을 것 같기도 한데요.
솔직히 선수들을 지도하고 싶은 욕심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이렇고, 조금 다르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팀을 맡아서 엘리트 선수를 지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아카데미를 통해서 도움이 필요한 선수나 동호인들에게 배드민턴을 가르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 같거든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배드민턴을 보급하는 것도 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학기 수업은 얼마나 맡았습니까?
학교에 있는 배드민턴 수업은 제가 거의 다 맡았어요. 엘리트 선수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일반 학생들이 대상이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수업하는데 별로 어려움은 없어요. 가끔 학생들이 수업 끝나고 사인해달라고 해서 조금 민망한 것 빼고는요. 하하하.

앞으로 어떤 교수가 되려고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교수라기보다는. 저는 남들이 해보지 못한 특별한 경험을 했고, 외국에서 생활도 해봤고요. 그런 다양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진로나 미래설계 등을 잘 도와주고 싶어요. 그리고 제가 아직 젊잖아요. 또 학교 선배기도 하고. 학생들이 언제든지 찾아와서 이야기할 수 있는, 또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친근감 있는 교수가 되고 싶어요. 학생들이 졸업을 하고 난 후에도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평생지도교수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초등학교 은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들이 내 재산이다.” 교육자는 나중에 제자들이 훌륭한 선수나 지도자 아니면 좋은 직장에 자리 잡는 걸 봐야 보람을 느낀다고 하세요. 그리고 가정을 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것이 가장 큰 보람이고 행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가족
김동문 교수는 선수시절 세계 혼합복식 무대를 평정했던 파트너, 라경민 대교눈높이 감독과 2005년 12월 25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3년간의 비밀 교제가 만천하에 공개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영원한 복식조가 된 이들에게는 한울, 한비 남매가 있다.

교수 임용되고서 가족들이 많이 기뻐했겠어요.
와이프는 작년에 먼저 귀국을 했고, 저 혼자 캐나다에 남아서 생활을 했었죠. 누구보다도 아내와 부모님이 가장 좋아했어요.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사실 때문에요.

그런데 지금 가족들과 떨어져서 생활하죠?
주말부부예요. 애들도 떨어져 살고 있어서 아이들이 많이 보고 싶어요. 저는 여기 익산 부모님 집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한국에 와서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거의 없어요. 학기가 시작되고부터는 일이 많아서 더 힘드네요.

어릴 때 집 형편이 어려웠다고 들었어요.
어려웠어요. 형제도 많았으니까요(4남 2녀 중 막내). 초등학교 때 학교에 야구부와 배드민턴부가 있었어요. 야구는 장비를 구입하는 비용을 모두 부담해야 했고 배드민턴은 거의 모든 것을 지원해줬기 때문에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죠. 본인이 직접 사야 되는 것이 유일하게 배드민턴 신발이었는데, 그 때는 신발을 사는 것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 당구장, 미용실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형편이 어려우니까 그때 돈을 벌자는 생각을 잠깐 했었습니다. 당구장에서 청소를 하는 아르바이트였거든요. 오래하지도 못했어요. 3-4일 밖에 못했죠. 그런데 당구장 사장님께서 제가 마음에 드셨는지, 그때 주니어대표팀에 뽑혀서 더 이상 못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리니까 당구장 매니저를 맡기고 싶으셨다면서 ‘알바비’에 여비까지 두둑이 챙겨주시면서 언제든지 또 오라고 하셨어요. 주니어대표팀에 들어간 후에 다시 찾아가서 감사인사를 드렸습니다. 제가 그때 성실하게 열심히 하긴 했거든요. 매일 운동 끝나면 당구장에 가서 죽어라 청소했었어요. 하하하. 매번 막차타고 집에 가고 그랬죠. 그리고 미용실은 아니고 이발소였는데, 이발소에서 청소하면서 머리를 감겨주는 아르바이트였어요. 그건 퇴짜를 맞아서 못했어요. 그때 머리를 감겨주는 테스트도 받았거든요. 제가 요령을 모르니까 잘 못했던 거죠. 그런데 그때도 이발소 사장님이 친절하게 좋은 말씀해주시면서 공짜로 머리도 예쁘게 깎아서 돌려 보내주셨어요. 참 좋은 분들을 만났던 것 같아요. 용돈 같은 건 상상을 못했던 시기라 조금이나마 생활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어린 마음에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 집에서는 어떤 아빠인가요?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데 유치원 선생님과 학부모 사이에 의견을 주고받는 노트가 있어요. 그 노트에다가 요구사항들을 꼼꼼하게 적어서 보내요. 평소에 애들을 챙겨주지 못하기 때문에 요구사항이나 의견들을 꼼꼼하게 적어요. 저는 감싸는 스타일이고요, 아내는 가끔 아이들한테 목소리를 높이는 스타일입니다. 애들과 마주할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겠죠. 물론, 모든 부모들이 그렇겠지만요.

아이들을 배드민턴 선수로 키울 생각은 없나요?
아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는데 분명 운동신경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배드민턴을 시킬지, 뭘 시킬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본인이 좋아하면 시켜볼 생각도 있습니다. 큰 애는 골프, 아이스하키, 미식축구도 좋아해요. 캐나다에서 경기를 자주 보러 다녀서 그런가 봐요.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길 바라고 있는지요.
아이들이 활발한 성격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저희 부부가 조용한 편이거든요. 쑥스러움도 많고. 그래서 그런지 큰 애는 조용해요. 둘째는 오빠와 다르게 굉장히 활발하고 애교도 잘 부리죠. 아이들이 어디를 가서나 친근감 있고 활발하게 지내면서 잘 적응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제일이죠.

요즘도 가끔 아내와 배드민턴을 하나요?
아니요. 거의 안해요. 지난해에 잠깐 같이 해본 게 가장 최근이에요. 캐나다에서 지도했던 선수들에게 좋은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서 같이 게임을 뛰어주고 그랬어요.

어떻던가요? 선수시절 파트너로 같이 할 때와는 느낌이 다를 것 같은데.
예전 운동할 때와는 다르죠. 지금은 라켓을 잡으면 둘 다 막 흥분합니다. 하하하. 아무래도 선수시절 파트너로 할 때와는 입장도 다르고요. 배드민턴에 대한 생각도 다르니까요. 그때는 제가 어려운 선배였는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하하하.

이런 가장이 돼야겠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요?
아이들에게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요. 다양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운동하고 싶다면 기회도 주고. 어떤 것에 재능이 있는지 잘 지켜봐야죠. 그리고 아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지칠 수도 있잖아요. 항상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려고요. 지금 서울에 아이들과 아내가 있거든요. 매일 가족들과 생활하다가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고 있어요. 같이 못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옆에서 잘 챙겨줘야 하는데 상황이 그렇지 못하니까. 또 지금은 장모님, 장인어른께서 아이들을 챙겨주시는데 항상 감사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요.



배드민턴은 나의 삶
김동문 교수는 2005년 수디르만컵(세계혼합단체배드민턴선수권대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1996애틀랜타올림픽 혼합복식 금메달, 2004아테네올림픽 남자복식 금메달 외에도 국제대회 76승, 14개 대회 연속우승(혼합복식)이라는 대기록을 남겨놓았다.

올해 원광대 코치로 등록했더라고요.
코치 등록은 지난해에도 했었어요. 지난해에도 그랬지만, 교수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제가 있는 동안에 후배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돕는 게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문제점이 보이는데 안해 줄 수도 없고, 또 최정 감독님께서 기술적인 자문도 구하셨어요. 앞으로도 도움이 된다면 열심히 도울 생각입니다.

배드민턴 대표팀에서 요청이 올 수도 있겠는데요.
일단, 지금은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으니까 학교가 우선이고요. 코트에서 같이 뛰고 땀을 흘리는 것 말고도 선수들에게 이론적으로 강의를 해줄 수도 있고,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대표팀에서 요청이 온다면 학교 수업에 지장이 없는 한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에요.

캐나다에서 운영하던 김동문국제배드민턴아카데미(Kimdongmoon International Badminton Academy)는 어떻게 되나요?
아카데미는 계속할 생각이에요. 방학 때 시간이 된다면 제가 직접 캐나다로 가고, 학기 중에는 선수들을 이쪽으로 오게 하려고요. 그리고 원광대 선수들과의 교류도 생각해보고 있어요. 제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벌써 캐나다 선수들이 몇 차례 원광대에 와서 훈련을 하고 갔어요.

여기 익산시에 있는 김동문 체육관은 이미 완공됐죠?
체육관은 완공됐고요. 체육관 안에 제 기념관을 만들기로 했는데 그건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공간만 확보해둔 상태예요.

김동문 체육관의 활용 계획은 혹시 세워뒀는지요.
캐나다가 운동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거든요. 그걸 익산시에 얘기했는데 좋다는 대답을 들었어요. 그래서 동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해요. 캐나다의 시스템을 우리 정서에 맞게 접목시켜서 좋은 프로그램을 국내 배드민턴 동호인들에게 제공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요넥스로부터 지금도 스폰을 받으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있나요?
지난 2월에 있었던 원천배 때 초등학교 지도자들하고 얘기를 많이 나눠봤는데, 국가대표 선수들이나 은퇴한 선수들이 꿈나무들을 위해서 강의도 해주고 직접 원포인트 레슨도 해주는 그런 행사를 좀 해줬으면 한다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동호인들을 대상으로 전국을 투어하면서 원포인트 레슨을 해드렸는데, 앞으로는 초중 엘리트 선수나 지도자들을 위해서 훈련 프로그램과 지도 방법에 대해서 상담도 해주고 직접 지도도 해주는 이벤트를 생각중입니다.

2008베이징올림픽 때는 KBS해설위원이었는데, 2012런던올림픽 때는 SBS해설위원이네요.
2008년도에는 대한배드민턴협회를 통해 요청이 있었고요. 그때는 해설이 처음이라 일방적으로 했어요. 우리나라 위주로. 하하하. 그러다 지난해 SBS에서 직접 요청이 있었습니다. 학교 일로 미루다가 지난해 말부터 해설을 맡게 됐어요.

해설하는 거 어렵지는 않나요?
현장에서 경기를 직접 보면서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녹화된 영상을 보고, 더군다나 경기 결과를 미리 알고 있으면서 생동감 있게 하는 게 조금 어렵더라고요. 지금은 올림픽을 앞두고 있어서 가끔 전체 해설위원들이 모여서 워크숍도 열고 있고, 방송국에서 직접 모니터링을 하면서 지적도 해주고 있어서 크게 어려움은 없습니다.

런던올림픽을 앞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3-4개월 남았는데요. 첫 번째는 부상관리죠. 부상을 입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훈련이 지금부터 올림픽체제로 바뀔 테고 강도도 훨씬 높아질 겁니다. 의욕이 앞서면 부상을 입을 수 있어요. 더 잘하려고 하기 보다는 컨디션이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유지를 하면 될 것 같아요. 올림픽에 처음 출전하는 선수들도 있고 두세 번 출전하는 선수들도 있는데, 너무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쉽지는 않겠지만 일반 오픈대회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했으면 좋겠어요. 마음 편하게. 주위에서도 부담을 주지 않으면 더 좋겠고요.

만약 지금 다시 현역으로 돌아간다면 파트너를 해보고 싶은 선수가 있나요?
다시해도 아내랑 해야겠죠. 또 (하)태권(삼성전기 코치)이랑 할 거고. 하하하. 서로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고 서로를 신뢰하기 때문이죠. 누구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호흡을 맞추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박주봉 일본 대표팀 감독, 이용대 선수(삼성전기)와 자주 비교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박주봉 감독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용대도 정말 잘하고요. 가끔 영상을 보면 내가 선수시절에 저 정도로 했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각각 10년 정도씩 차이가 나요. 박주봉 감독님, 저, 그리고 용대가. 각각 그 시대의 플레이 스타일이 다르니까요. 비교하는 것 자체가 힘들죠. 그리고 박주봉 감독님은 선수 생활도 화려하게 하셨지만 지도 능력이 정말 뛰어난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참고로 제 롤 모델이 박주봉 감독님이시거든요.

현역시절 가장 아쉬웠던 대회는 아무래도 2000년 시드니올림픽인가요?
시드니죠. 1996애틀랜타, 2004아테네보다는 그때가 더 유력한 우승후보였어요. 두 종목 모두. 그때가 제게는 두 번째 올림픽이었거든요. 그때 제대로 올림픽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1996년도에는 부담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 기량 그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어요. 시드니 때가 많이 아쉬워요. 남복과 혼복 두 종목 모두 금메달을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아마 시드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면 아테네 올림픽은 더 쉬웠을 겁니다. 부담이 가는 올림픽이 아니라 쉬운 오픈대회처럼 만들어 버리는 거죠. 하하하. 거의 8년을 아내와 파트너를 하면서 많은 대회에서 우승도 했고 기록도 가지고 있지만, 올림픽하고는 인연이 없었던 것 같아서 가장 마음이 아파요.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도 올림픽인가요?
올림픽 때도 그렇고, 결승전 상대가 모두 한국이었잖아요. 그리고 대회들 하나하나가 다 기억에 남아요. 그중에서도 1999년도 세계선수권 때 남자복식, 혼합복식 모두 우승을 했었거든요.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건지도 몰랐어요. 예전에는 2년마다 세계선수권대회 개인전을 했는데, 그 다음 2001년도 세계선수권에서는 남자복식, 혼합복식 둘 다 준우승을 했어요. 그때 몸이 정말 아팠거든요. 그래도 감독님께서 일단 출전만 하자고 하셔서 그냥 따라갔다가, 어찌어찌하니까 결승까지 올라간 거예요. 그런데 결승에서는 도저히 못 뛰겠더라고요. 혼합복식에서는 파이널게임에서 17대 16으로 져서 준우승했고, 남자복식에서는 15-0으로 졌어요. 제 배드민턴 인생에서 첫 번째 0점 게임이었어요. 결승전에서 15-0으로 패하는 것도 그리 흔치 않은 일일 걸요. 하하하. 그 대회 끝나고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어요. 결국 몸이 더 망가져서 돌아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대회들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김동문은 그 다음 2003년도 세계선수권에서 혼합복식 우승을 차지했다. 남자복식은 기권했다.)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초등학교4) 5-6개월 동안 계속 체육관에 가서 구경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배드민턴이 하고 싶었나요?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쫓아 다녔죠. 하하하. 집 사정이 힘들 때였는데, 제가 우겨서 배드민턴을 시작했거든요. 고집을 부렸죠. 그때 생각했던 게, 유명한 선수가 돼서 돈도 많이 벌고 부모님 호강시켜드려야겠다 뭐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전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부모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배드민턴 실력이 급속도로 성장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처음에 대표팀에 들어갈 때는 단식 선수로 발탁이 됐어요. 물론 단식보다는 복식에 더 소질이 있었죠. 2년 정도 단식을 하다가 복식으로 완전히 바꿨죠. 고등학교 때 키도 크고 힘도 붙었고 한두 가지 기술을 스스로 터득하고부터 모든 것이 쉽게 받아들여졌어요.

그 기술이 뭔가요?
공격적인 클리어였어요. 드리븐 클리어라고 하죠. 그 기술을 익히고부터 경기가 쉬워졌어요. 그 기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난 다음부터 매번 지던 상대한테 이기게 됐고, 같은 또래 선수들의 볼이 쉽게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1996년도에 애틀랜타올림픽 끝나고 난 후에 전주에서 카퍼레이드를 했는데, 그때 임채경 감독을 앞자리에 모셨잖아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제게 처음 배드민턴을 가르쳐주신 분이고, 제가 아버지처럼 생각하는 분이에요. 같이 운동한 친구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요.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가장 앞자리에 모시고 싶었을 거예요.

다시 태어나도 배드민턴을 할 것 같아요?
옛날 환경에서 배드민턴을 하라고 하면 안할 것 같아요. 지금이야 운동할 수 있는 여건이 워낙 잘 돼 있어서, 다시 운동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하.

배드민턴의 매력은 뭘까요?
배드민턴은 남녀노소 누구나 온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훌륭한 스포츠죠. 거기에 가장 큰 매력이 있고요. 배드민턴이 굉장히 어려운 스포츠거든요. 감각적인 스포츠인데 센스도 있어야 하고 강한 체력도 필요해요. 빠른 스피드의 볼을 컨트롤해서 받아 넘기는, 그 끝날 듯하면서도 끝나지 않는, 그러면서 포인트를 따낼 때는 엄청난 쾌감이 있죠.

요즘도 꾸준히 운동하나요?
은퇴 후에 운동을 거의 못했어요. 계속 하려고 마음은 먹었는데, 그리고 사실 은퇴 후에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그런데 실행에 옮기지 못했어요. 지금도 운동을 못하고 있어요. 이제는 학생들과 함께 축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해야 되기 때문에 몸 관리를 해야겠죠.

앞으로 한국 배드민턴이 어떻게 발전해야 할까요?
모든 스포츠가 다 그렇죠. 기초가 중요해요. 초등학교가 없으면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나올 수 없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꿈나무 발굴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야 배드민턴의 미래가 밝잖아요. 지난번 원천배에서 멘토스쿨을 하면서 초등학교 어린 선수들하고 대화를 나눠봤거든요. 어린 선수들의 꿈에 대해서 들었는데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줘야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꿈나무들을 많이 발굴해서 선수층을 더 두텁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어떤 역할을 맡을 생각인지요.
앞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이끌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쪽으로도 배드민턴 발전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생각해요.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할 생각이고요. 대한배드민턴협회와 엘리트선수들을 위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죠.

고민이 없을 것 같아요. 선수로서 올림픽 금메달도 땄고, 목표로 세웠던 교수도 됐고.
예전부터 꿈꿔왔던 일이지만, 또 다른 환경에 적응해야 하니까요.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고, 부족함도 채워야하고. 빨리 적응하는 게 우선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 김동문이, 그동안 쌓아온 배드민턴 기록들에 묻히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에요. 배드민턴 해설가로서도 마찬가지고요.

 

황제의 소문과 진실

효자 김동문?

효자 아닌 사람이 있나요? 하하하. 부모님 속 썩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어릴 때부터 운동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냈잖아요.

영국, 프랑스 대표팀 감독 제의?
은퇴하고 2005년 초에 프랑스 대표팀에서 감독 제의가 왔었어요. 그리고 9월쯤에 영국 대표팀에서 감독 제의가 있었고요. 당시에 6개월 정도 한국 대표팀에서 코치를 하고 있었거든요.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그 무렵에 BWF에서 월드트레이닝센터를 미국에 설립한다면서 코치 제의도 있었어요. 여러 나라 선수들이 미국 비자를 받는데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여론 때문에 무산된 걸로 알고 있고요. 여하튼 그랬는데, 제가 그때는 먼저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라경민과의 결혼, 김중수 전 대표팀 감독의 중매?
하하하. 감독님 때문에 결혼을 한 건 아니고요. 감독님께서 저희가 2000년도(시드니올림픽)에 패하고 난 후부터 둘이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라고 그런 말씀을 은근히 많이 하셨어요. 둘 다 말수가 적으니까 서로 얘기를 많이 하라는 의미였던 걸로 알고 있어요.

김동문은 말술?
예전에는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정말 많이 마셨죠. 그러다가 캐나다로 가면서부터는 가족들과 대다수의 시간을 보냈으니까 술을 거의 안 마셨죠. 요즘은 여기 저기 술자리가 너무 많네요. 그런데 이제는 예전만큼 못 마시겠더라고요. 하하하.

김동문은 후보선수였다?
어릴 때 저보다 더 잘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팀에서는 밀렸지만, 전국에 같은 또래들하고 비교했을 때는 못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사실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후보선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죠. 하하하.

수준급의 골프실력?
캐나다에서 적응하느라, 거기 사람들하고 어울리면서 처음 배웠던 거예요. 골프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게 좋은 것같아요. 캐나다 가기 전까지는 낚시하는 걸 좋아했어요. 혼자서 민물낚시를 자주 다녔거든요. 이것저것 혼자서 생각하기에도 좋고요. 캐나다에서는 낚시하러 가는 게 오히려 골프보다 더 비용도 많이 들고 어려워요. 하하하. 요즘에는 다시 낚시를 해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리고 제가 학교에 왔으니까, 교내에 배드민턴 붐을 일으켜 볼 생각입니다.



김동문 원광대학교 스포츠과학부 사회체육학 전임교수
1996 애틀랜타올림픽 혼합복식 금메달(-길영아)
2004 아테네올림픽 남자복식 금메달(-하태권)
2002-4 혼합복식 14개 대회 연속 우승(-라경민)
1999 대한민국 체육훈장 청룡장
2002, 2003 BWF 올해의 선수
2003 대한민국 체육대상
2009 BWF 명예의 전당


익산=심현섭 기자 | 사진 김종현

[배드민턴코리아 2012년 4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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