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칼럼] 밥을 같이 먹는 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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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드민턴코리아 댓글 0건 작성일 2011-04-25 12:19본문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열연한 영화배우 조인성은 극중에서 ‘식구’를 정의했다. “식구가 뭐여, 밥 식, 입 구. 같이 밥 먹는 입구멍이여.” 조인성에 따르면 밥을 함께 먹는 사이가 식구다. 조인성은 영화에서 덧붙인다. “혼자 밥쳐먹는 놈은 무어여, 더러운 놈이여, 가족이 아니여”라고. 함께 살고, 함께 죽는 동지 보다, 친구 보다 식구라는 말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가족은, 식구는 함께 밥을 먹는다. 먹거리에 대한 욕망을 나누면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래서, 옛날 아버지들은, 꼭 아침 저녁을 가족이 한 데 모여 먹어야 한다고 그토록 강조했을지도 모른다.
스포츠의 세계에서도, 어쩌면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함께 모여 운동을 한다는 것 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밥을 함께 먹음으로써 팀 워크를 다질 수 있다.
메이저리그 탬파베이 레이스는 만년 꼴찌 팀이었다. 1998년 창단해 2007년까지 10시즌 동안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5팀 중 딱 한번 4등을 해 본 것을 뺀다면 매년 꼴찌를 도맡았다. 162경기를 치르는 동안 승률 4할 넘기가 쉽지 않았다. 한 해도 빼놓지 않고 90패를 넘겼고, 그 중 3시즌에서는 100패를 넘게 당했다. 2002년에는 무려 106패를 당했다. 그랬던 탬파베이는 2008시즌, 대변신을 했다. 쟁쟁한 지구 라이벌,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를 모두 따돌렸다. 100패를 밥먹듯 하던 팀이 거꾸로 97승을 거뒀고 65패밖에 하지 않았다. 비록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 패하는 바람에 월드시리즈 우승은 막혔지만, 아메리칸 리그를 평정했다.
비결은 불펜이었다. 탬파베이 조 매든 감독은 불펜 강화를 위해 LA 에인절스에서 은퇴를 선언했었던 트로이 퍼시벌을 설득했다. 매든 감독은 탬파베이 감독을 맡기 전 에인절스의 벤치 코치였다. 매든 감독이 생각하기에 탬파베이를 분발시키기 위해서는 리더십 넘치는 퍼시벌의 존재가 절실했다. 퍼시벌은 매든 감독의 간청에 마음을 움직였다. 은퇴를 번복하고 탬파베이 유니폼을 입었다. 퍼시벌은 팀 마무리로서 비교적 어린 나이의 불펜 투수들을 이끌어야 했다. 중간계투진 전체가 팀을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퍼시벌의 지론이었다. 퍼시벌은 어린 투수들을 한데 뭉치게 할 수 있는 비법을 고민했다. 이를 위한 시작은, <비열한 거리>의 조인성과 같았다. 밥을 함께 먹는 것이었다. 퍼시벌을 필두로 탬파베이 불펜진은 원정경기 때 오전 11시45분에 모두 로비에 모였다. 그리고 함께 밥을 먹었다. 홈 경기 때는 각자 집에서출발하기 때문에 어렵지만 원정경기에서는 무조건, 함께 밥을 먹었다. 밥을 함께 먹으면서 서로를 잘 알게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불펜진 중 한 명인 댄 휠러는 “투수는 누구나 혼자 마운드에 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늘 모두 하나가 돼서 마운드에 오른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함께 밥을 먹은 효과다. 탬파베이 불펜투수들은 하나로 똘똘 뭉쳤고, 월드시리즈 진출이라는 기적을 일궈냈다.
옛 어른들이 말한 ‘밥심(힘)’은 단지 영양공급원으로서의 의미를 뛰어넘는다. 밥을 함께 먹음으로써 그 힘을 모을 수 있는 게 진정한 의미의 밥심이다.
영화와 야구 얘기를 늘어 놓은 것은, 배드민턴 국가대표팀의 ‘식구 정신’을 꺼내고 싶어서였다. 해마다 3월이면 배드민턴 대표팀은 영국 버밍엄에 열리는 전영오픈과 곧이어 벌어지는 스위스 오픈에 참석하는 장기간 투어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같은 기간 그들은 머나먼 타국 땅에서 함께 모여 밥을 먹는다. 그냥 먹는 게 아니라, 숙소에서 지어 먹는다.
전영오픈 숙소는 대회가 열리는 경기장에서 차로 10분 거리다. 전형적인 영국 교외의 풍경. 나즈막한 3층짜리 건물이 대표팀의 ‘전통적’ 숙소다. 방을 빌릴 때 아예 회의실이 딸린 방을 함께 빌린다. 그리고 그 회의실은, 대회 기간 동안 식당이 된다. 간단한 탕비실이 딸려 있어 설거지가 가능하다. 조리대는 회의실 테이블을 모아 붙여 만든다. 장을 봐 오는 것은 김중수 대표팀 감독의 역할이다. 1991년 부터 자청해서 맡았던 ‘대표팀 요리사’ 자리가 20년 가까이나 흘렀다. 이제 채소의 겉모습을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채소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다. 김 감독은 “채소 고르는 데는 실패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머나 먼 이국 땅에서 자란 채소임에도, 김 감독이 고르면, 우리 입맛에 딱 맞는다.
‘식구’들이 많다 보니 밥 짓는 양도 만만치 않다. 커다란 밥솥은 대표팀이 꼭 챙겨 갖고 다니는 필수 아이템. 음식을 보관할 냉장고는 너무 커서 갖고 다닐 수가 없다. 대신 전영 오픈 기간 동안 사용하려고 현지 유학생의 집에 아예 1년을 맡겨 뒀다가 대회 때만 가져다 쓴다.
음식 장만에는 선수와 코치 구별이 없다. 김 감독의 김치찌개도 수준급이지만, 김학균 코치의 칼질은 달인 수준이다. 지금은 은퇴한 여자 단식의 전재연도 요리사 뺨치는 음식 솜씨를 지녔다. 경기 시간이나 훈련 시간에 맞춰 자연스럽게 음식 담당이 정해진다.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고, 찌개를 끓인다. 그리고 함께 모여 밥을 먹는다. 예상 외로 초반에 탈락한 선수에게 선배는 조용히 밥 한 숟갈을 더 얹어주고 반찬을 앞에 다 끌어다 놓는다. 함께 나눠 먹는 밥은 서로를 더욱 필요한 존재로 만든다. 배드민턴은 개인 종목이지만, 댄휠러가 말했듯, 함께 먹은 밥 덕분에 대표팀은 모두 하나가 되는 마음으로 대회에 참가한다.
2008 전영오픈에서 한국 대표팀은 처음으로 남자 복식의 이용대‐정재성과 여자 복식의 이경원‐이효정이 동시에 우승을 하는 경사를 맞았다. 그때 그 금메달 2개는 함께 모여 먹는 밥심에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표팀이 지어먹는 밥은 공식적으로 선수들의 컨디션 조절을 위한 것이지만, 함께 지어먹는 행동만으로도 서로의 팀워크를 다지는데 충분한 도움이 된다. 2008 전영오픈 당시 대표팀 막내였던 이용대는 동기생인 조건우와 함께 주로 설겆이를 했다. 그 좁은 탕비실에서 설겆이를 하며 올림픽 금메달을 꿈꿨을지도 모를 일이다.
2010 전영오픈에서는 아쉽게 아무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이용대가 아직 팔꿈치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래 유럽대회에서는 유럽세가 강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대표팀 선수들은 함께 모여 밥을 지어 먹었다. 대표팀은 ‘식구’다. 세계단체선수권대회에서 그 밥심은 더욱 위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PS. 김중수 감독이 ‘대표팀 요리사’에서 은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그 김치찌개를 못 먹게 된다고 생각하니, 어쩌면 대표팀 전체의 경기력 약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소심한 걱정이 든다. 그 김치찌개는 정말 맛있었다.
이용균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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