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ews 명장 김중수 ‘영욕 ( 榮辱)의 시간 ’ 1편

페이지 정보

작성자배드민턴코리아 댓글 0건 작성일 2011-04-27 18:09

본문

명장 김중수 ‘영욕 ( 榮辱)의 시간 ’
제1편 . 국가대표 감독이 되기까지

지난해 12월 김중수 감독이 국가대표팀 수장에서 물러났다. 2001년부터 10년간 맡아온 중책이었다. 김 감독은 2002부산아시안게임, 2004아테네올림픽, 2006도하아시안게임, 2008베이징올림픽, 2010광저우아시안게임과 각종 국제대회들을 치르며 21세기 초반 대한민국 배드민턴을 이끌었다.
김 감독은 1986서울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는 등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했고, 은퇴 후에는 주니어대표팀 코치로, 이어 국가대표팀 코치로 10년간 활동했다. 국가대표로 30여년의 시간을 보낸 셈이다.
배드민턴코리아는 김 감독의 지난 영예롭거나 치욕스러웠던 시간을 듣고자 했다. 1월 초, 그의 안식처가 있는 전라남도 화순을 찾았다. 그와의 인터뷰를 비장하거나 거룩하지 않게 구어체로 가감 없이 옮긴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기분은 어떠신가요?
지금은 일단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들고, 너무 오랫동안 하다보니까. 원래 베이징(올림픽) 끝나고 그만두려 했는데, 아시안게임까지 해달라고 해서 했지. 막상 그만두려니 그 20년이 허전하기는 하지, 그런데 내가 나가야 후배들이 올라오는 것이니까 서운한 것도 없고.

-앞으로의 계획은 잡으셨나요?
어떤 것을 해야 할 지 아직은 생각을 못했어. 내 나이(52)에 어떤 팀을 맡는 것도 불가능하고, 원하지도 않고. 한편으로는 어차피 배드민턴에 몸 담았으니 일이 주어진다면 해보고 싶기도 하고. 어린애들을 키워보고 싶기도 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아카데미 같은.

-감독님의 지난 이야기들을 배드민턴코리아에서 연재를 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어요? 한 10개월 정도 예상하고 있는데.
연재라... 음... 그래.

-감독님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라켓을 처음 잡을 때부터요.
그때는 지금처럼 배드민턴이 활성화 됐을 때가 아니야. 팀도 6~7개 정도 밖에 없었고. 소년체전에 나가면 동네에서 배드민턴 하던 애들도 나오고 그랬어. 내가 국민학교(광주교대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라켓을 잡았는데, 우리학교에 코치가 없는 거야. 지도자가 없었어. 그래서 선배들한테 배우고 그랬지. 그래도 우리가 그때 전국을 쓸었었어.

-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어떠셨나요?
중학교 올라가면서 그 멤버가 뿔뿔이 찢어졌지. 뽑기였거든. 몇몇은 운동 안한다고 일반학교로 갔고. 나는 중학교(광주 충장중학교)에 올라가서 이금재 코치님(전 대한배드민턴협회 회장)을 만났지. 그 코치님이 나의 첫 코치님이셨어. 고등학교(동신고등학교) 때도 코치님이 없었지, 선수도 둘뿐이었어. 나하고 정재택이란 친구하고. 지금은 학교 선생님하고 있는. 1년 선배인 김영만 선배까지 합하면 세 명이었는데 선배는 그만뒀고. 어쨌든 그때는 팀을 꾸리기가 너무 어려웠어, 둔동도 혼자 하느라 정말 힘들었고. 배드민턴 그만두려고 마음을 먹기도 했지. 당시 아버지께서 전남 사격연맹 쪽과 관련돼서 고등학교 2학년 올라갈 무렵 사격선수로 5~6개월 잠깐 활동하기도 했었어. 전남 시합도 나가보고 그랬지. 그래도 다시 마음잡았어. 배드민턴 한 게 아깝고 오기가 생기더라고. 혼자서 열심히 했지. 전국대회 성적도 냈고, 2학년 말쯤에는 대표팀에도 들어갔어. 그때 대표팀은 최병학(동양대 감독), 양경석(전주성심여중 감독), 권승택(삼성전기 감독), 나까지 4명이었어. 최병학과 내가 막내였고.

-그 후에는요?
대학교 갈 때도 파란만장했지. 고등학교 3학년 때 개인 성적이 좋았거든. 단체전은 별로였지만. 그래서 그때 한국체대로 갈 것인가, 우리 지역에 있는 조선대로 갈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어. 처음에는 한국체대 가기로 마음먹고 준비를 거의 다 했는데, 최종신체검사 앞두고 결국 조선대로 진로를 바꿨어. 조선대에서 “동기를 안받겠다, 팀을 해체하겠다”는 등의 압박이 들어왔거든. 최종적으로 조선대를 가게 됐지. 다행히 한국체대 박기현 교수님께서도 내 사정을 잘 들어주시고 이해해 주셨지. 그때 부모님과도 많이 싸웠어. 머리 싸매고 누우시고 그랬지. 그런데 문제는 조선대 입학원서를 살 돈이 없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있나. 전당포를 찾았지. 당시 아버지께서 졸업선물로 사주신 세이코 시계를 전당포에 잡혔어. 무사히 입학원서를 냈지. 나중에 부모님께서 이해해 주셔서 시계는 다시 찾았고. 후에 알게 됐는데 그때 조선대 학장, 담당교수님들 이 부모님께 “교수를 시켜주겠다”는 식의 사탕발림을 하셨더라고. 지금 와 보니까 다 뻥이었어.(웃음)

-잠시, 부모님은?
지금 부모님은 연로하시지. 어머니는 81세인데 편찮으셔서 요양원에 계시고, 아버지는 83세고 그래.

-대학교 때에는 어떠셨나요?
대학교 3학년 때 대표팀에 다시 들어갔어. 대표팀에 들어가서 토마스컵(세계단체배드민턴선수권) 지역예선을 나갔지.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지역예선이라고 해서 단계별로 시합하고 그랬거든, 우리 때 처음 대만을 누르고 1회전을 통과했어. 그런데 2회전에서 떨어졌지. 태국하고 시합이었는데 우리가 졌어. 박주봉이 단식과 복식을 모두 뛰어야 했는데, 그때 박주봉이 감기에 걸린 거야. 그래서 복식선수였던 내가 단식을 뛰었거든. 그때 정말 힘들었어, 쌍코피가 나더라고. 그 에어컨도 제대로 안된 더운 체육관에서 솜으로 코를 틀어막고 뛰는데, 숨이 차서 죽겠는 거야. 그래서 피가 나오든가 말든가 솜 빼서 집어던지고 뛰었지. 그래도 그 경기는 이겼어. 복식에서는 졌지만. 대학교 4학년 때에는 아시안게임을 포기하고 전국체전 우승을 위해 뛴 적도 있는데. 여러 요인으로 대표선발전에서 탈락했어. 물론 전국체전은 우승했고. 그런데, 졸업 무렵 상무에 입대해서 서러운 일이 생겼지. 춥고 힘든 겨울날, 훈련 중에 뉴스를 봤는데 우리나라가 동메달을 딴 거야. 그 때는 아시안게임 동메달까지 군 혜택이 있었거든. 땅을 치고 통곡을 했지.(웃음)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전역할 무렵, 그때도 전역과 시합(여름철)이 겹쳐버린 거야. 윤중오 감독님(현 국군체육부대 감독)은 “뛰고 나가라”고 하시고. 그래서 어쩔 수 있나 전역을 한 달 연기했지. 그 시합도 우승을 시키고 조금 늦은 전역을 하니까, 부대장이 감사패를 주더라고.(웃음)

-선수시절 어떤 선수였나요? 파워가 좋았다고 전해지던데요.
당시에는 무조건 체력하고 파워밖에 없다고 생각했지. 아마 그때 내가 파워는 가장 세지 않았을까 싶어. 다른 사람들도 인정할거야. 셔틀 잡는 귀신이었거든. 뜨면 무조건 공격이었어. 그만큼 때릴 자신이 있었지. 하루 5게임 뛰어도 지치지 않았어, 체력하나는 좋았던 것 같아. 나는 대학교 때까지 새벽운동을 혼자 했어. 우리 부모님도 인정하시는데, 새벽운동을 하루도 안쉬고 했지. 광주 교육대학교 앞이 원래 집이었는데. 산 올라가는 전망대 길, 그리고 조선대학교 본관 무지하게 높은 계단을 매일 뛰었어.

-지금의 선수들과 비교한다면?
지금은 패턴이 달라. 지금은 선수들을 성적위주로 가르치기 때문에 기교나 잔기술이 굉장히 좋아. 그러나 체력적인 부분은 예전 선수들에 못 미치지.

-전역 후 진로는요?
1985년도에 전역을 하고 대표팀에 바로 들어갔지. 그리고 실업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전남체육회에 들어갔어. 당시 이금재 회장님이 전남 전무이사를 맡고 계셨는데 “고향을 위해 뛰어라”하시더라. 그 다음해인 1986년에는 서울아시안게임을 뛰었고, 그리고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지었어.

-1986서울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얘기를 조금 더 해주세요.
그때 이득춘(주니어대표팀 감독)과 (남자복식)한조였어.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것도 좋았는데, 개인전에서도 욕심을 냈었거든. 당시 김문수-박주봉은 최강이었고, 우리도 한번 붙어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지. 그런데 아쉽게 됐어. 8강에서 중국하고 붙었는데, 하필 그때 우리나라 선심이 오심을 본거야. 그것도 우리가 불리하게. 이겼으면 결승에 서 김문수-박주봉 하고 한번 붙어보는 건데. 끝나고 나니까 운동에 회의가 느껴지더라고. 참, 그때 그 시합 끝나고 이득춘이 라켓 던지고 난리 났었잖아.(웃음)

-잠시만, 박주봉 감독과 같이 선수생활 하셨죠? 당시 박주봉은 어떤 선수였나요?
 어렸을 때 같이 붙고 그러지는 않았어. 4살 차이가 나거든. 옆에서 본 박주봉은 엄청난 연습벌레야. 철두철미한 자기주의.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실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어. 고등학교 때 대표팀에 들어갔고. 파워는 조금 떨어졌는데, 기교나 스트로크, 특히 네트플레이가 남들보다 한수 위, 나이에 비해 노련하기도 했고.

-박주봉 감독을 지금 선수들과 비교한다면 어떤가요?
지금 선수들은 못 따라가지. 박주봉은 하루를 운동으로 시작해서 운동으로 끝나. 그런데 요즘 애들은 운동이 거의 두 번째고, 자기 생활이 먼저니까. 그게 실력이지. 실력은 거기에서 나오는 거야.

-박주봉 감독과 지금도 자주 연락하고 지내시나요?
둘도 없지. 엊그제도 통화했고. 가서 만나고, 와서 만나고. 자주 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당시 은퇴가 좀 이르지 않았나요?
내가 27살이었어. 더 할 수 있었는데, 나름대로 생각한 것도 있고 그만둔다고 했지. 누가 잡은 사람도 없고.(웃음) 내게 은사님이 두 분 계신데, 한성귀 감독님(전 국가대표 감독)하고 이금재 회장님이야. 한성귀 감독님이 후에 “내가 그때 잡으려 했는데 네가 그만둬서 아쉬웠다”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더라고. 그리고는 곧장 지도자 생활을 하신 거죠? 1987년도에 김학석 부회장님(현 대한배드민턴협회 부회장)이 내게 처음 지도자의 길을 권하셨지. 그래서 주니어대표팀 코치를 맡게 됐어. 그게 시작이었고.

-그때 주니어대표팀 선수들은 누구였나요?
방수현, 안재창, 김지현, 강경진, 이용선, 정은하, 손희주, 이광진 등이었어.

-선수들과 같이 1991년에 대표팀 코치로 올라가신 건가요?
정확하게는 대표팀 코치 자리가 났기 때문이지. 그리고 선수들이 주니어에서 올라가는 단계기도 했고.

-대표팀 코치생활과 주니어대표팀 코치생활은 어떻게 다른가요?
주니어는 방학 때나, 특별훈련 기간에만 훈련을 하고. 대표팀은 1년 12달을 선수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니까 그게 다르지.
그때는 진해선수촌이었어. 태릉선수촌에는 배드민턴장이 들어설 여력이 안됐거든. 진해선수촌은 분촌이라 봐야지. 해군 기지였어. 1983~4년쯤에 개장을 했던 것 같아. 그때 배드민턴은 진해선수촌에서 훈련했어.

-1991년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죠? 결혼에 대해서...
내가 주니어대표팀 코치로 있을 때 아내(정명희 화순군청 감독, BWF 명예의 전당)를 만났지. 1986년도에는 같이 선수생활도 했었고. 대표팀 코치로 옮기고 아내가 국가대표일 때 1991년 6월 9일에 결혼했어. 5월 세계선수권이 끝나고. 결혼식하고 3박 4일 신혼여행 갔다가 곧장 선수촌 들어갔지. 아내는 선수로, 나는 코치로.

-두 분이 어떻게 연인으로 발전하셨는지요?
그때 내 나이가 서른이 넘었었거든. 당시 옥복은 선생님(전 주니어대표 감독)이 중매를 섰어. “가까운 곳에서 찾아라”하시더라고. 그러다가 1990년에 들어서 김학석 부회장님이 결정적으로 “둘이 결혼해라”하시는 거야. 그분이 선수끼리 연애
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셨거든. 그런데 우리한테는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렇게 한 2년 만났어. 처음에는 아내가 버텼지.(웃음)

-그리고는 곧장 화순에 자리를 잡으신 건가요?
처음에는 광주에 전셋집을 차렸어. 대표팀 코치를 하면서 나주시청 감독으로 가게 됐거든. 1995년도쯤 화순에 완전히 정착을 했지.

-정명희 감독은 어떤 아내이고, 어떤 지도자인가요?
좋은 지도자인데, 그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게 아쉽지. 아이들도 이곳 화순에 있고. 대표팀을 지도할 수 없는 여건이니까. 아내로서는 뭐, 20년간 떨어져 생활한다는 게 힘든 일이잖아. 그런 내조가 있으니까 내가 활동할 수 있었지. 흠잡을 데 없는 내조자로 봐야지.

-아이들은?
두 형제. 18살, 17살. 김용국, 김용우. 화순에서 학교 다녀.

-다시 본론으로, 국가대표 코치 때, 어떤 코치였나요?
죽음이지 죽음. 내가 인상을 쓰면 무서운가봐. 그때는 한창 젊을 때라 사정없었거든. 지금 대표팀 애들도 접근을 잘 못해.(웃음)

-그렇게 꼬박 10년을 대표팀 코치로 보내다가 2001년에 국가대표 감독이 됐는데, 당시 모양새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성적이 나빠서 감독이 책임지고 물러난 듯 보입니다. 배경이 어땠나요?
그때는 운이 나빴어. 우리가 금메달 0순위라고 믿었던 김동문-라경민이 자빠졌잖아. 남자복식은 금메달을 확신하지 못하던 상태였고. 혼복이 좌절되고 나니까 엉망이 됐어. 우리나라가 어느 한 선수에게만 의존한다는 것이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지. 여러 종목에서 성적을 내도록 체계를 잡아야했는데, 그때는 김동문-라경민에게 의존한 거나 마찬가지였거든. 박주
봉, 방수현, 김지현 등이 은퇴했고, 그때가 세대교체 중이기도 했고.


심현섭 기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