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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왜 약수터에서 배드민턴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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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드민턴코리아 댓글 0건 작성일 2011-11-28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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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고 약수터에서 한판 붙자 용대야
진짜 배드민턴은 약수터에서 이겨야 진짜인거다
형이 약수터 배드민턴 올해로 14년 경력이다
너 따위 나약한 일반코트에서 플레이하는 온실 속 화초 같은 X은
진정 실전인 약수터 배드민턴으로 무장된 나에게 안통한다
참고로 우리 동네 약수터는 투명네트인거 참고하고 오도록 하거라
할머니 생선가시 살 발라주듯 널 발라주마


[배드민턴코리아] 2008베이징올림픽에서 이용대-이효정 조(이상 삼성전기)가 혼합복식 금메달을 확정짓고, 이용대가 카메라를 향해 윙크를 날린 후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왔던 재미있는 글이다.

재치만점인 네티즌는 자신을 14년차 약수터 배드민터라고 밝혔고, 이용대는 당시 약관의 나이인 11년차 배드민터였다. 당연히 이 흥미로운 역사적대결(?)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뤄졌다 하더라도 4-21 정도로 이용대가 승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3점 정도는 실수로 내주고, 1점 정도는 바람의 영향으로 아웃됐으리라.

어쨌거나 왜 약수터에서 배드민턴을 하는 것일까?
혹자는 “약수터는 공간이 넓지 않고, 산 중턱이나 정상 부근이라 무거운 장비를 들고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배드민턴은 라켓과 셔틀콕만 들고 가면 어디에서든지 할 수 있으니까”라며 제법 객관적이고 그럴듯한 답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약수터에서 배드민턴을 하게 된 정확한 이유는 ‘배드민턴 초창기 보급과정’ 때문이다.

대한배드민턴협회가 창립된 것은 1957년, 그리고 배드민턴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다. 1960년대 당시 초창기 국내 배드민턴 선수들은 배드민턴이라는 종목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지금처럼 배드민턴은 언제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특히, 약수터를 집중 공략했는데 틈이 날 때마다 서울의 주요 약수터를 돌며 배드민턴을 전파했고, 여름철에는 전국을 돌아 다녔다. 그 결과 국내 약수터를 중심으로 배드민턴 동호회가 생겨났다. 그리고 약수터 인근 공터에 배드민턴코트가 만들어졌다.

배드민턴의 국내 보급을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면. 1981년 황선애 선수가 전영오픈 여자단식에서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하며 각종 매스컴에서 대서특필됐다. 그 후 배드민턴은 국내에 급속도로 전파됐다. 훗날 배드민턴은 새마을운동을 이끌 생활스포츠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이어 배드민턴은 1982뉴델리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을 시작으로 한국의 효자종목이 됐고 1988서울올림픽 시범종목, 1992바르셀로나부터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면서 박주봉, 방수현, 김동문, 이용대로 이어지는 걸출한 스타들을 탄생시켰다. 함께 배드민턴 인구가 엄청나게 는 것도 물론이다.

이렇게 약수터는 한국 배드민턴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약수터 배드민터들이 서서히 하산해 체육관을 찾는 추세지만, 지금도 여전히 약수터에서 셔틀콕을 날리는 배드민터가 많다. 새벽안개를 헤치고 맞바람과 싸우며 스매시를 꽂아 넣는 짜릿함이란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가끔은 가족들과 함께 ‘투명네트’를 치고 셔틀콕을 날리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약수터에서 배드민턴을 할 때에는 목에 가볍게 수건을 두르는 센스를 잊지 말자.


심현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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