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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nament GOOD BYE 슈퍼단, 린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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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드민턴코리아 댓글 0건 작성일 2020-07-13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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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세출의 배드민턴 황제, 린단이 은퇴했습니다. 지난 7월 8일, 랠리25에 올라온 린단 특집 시리즈 기사를 배드민턴코리아에 소개합니다.  


* 썸네일 및 본문에 활용된 사진은 요넥스에서 제공 받았습니다. 


[랠리25] 불세출의 배드민턴 황제, 린단이 지난 7월 3일 전격 은퇴를 발표했습니다. 올림픽 4회 출전(2004, 2008, 2012, 2016)에 금메달 2회 획득(2008, 2012), 아시안게임 남자단식 금메달 2회(2010, 2014), 아시안게임 남자단체전 금메달 3회(2006, 2010, 2018), 세계선수권 5회 우승(2006, 2007, 2009, 2011, 2013), 토마스컵(세계남자단체선수권) 6회 우승(2004, 2006, 2008, 2010, 2012, 2018), 수디르만컵(세계혼합단체선수권) 5회 우승(2005, 2007, 2009, 2011, 2015) 등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린단인데요.


국제대회 개인전에서 통산 66회 우승, 단체전까지 포함하면 81개의 우승 전력을 갖고 있는 린단입니다. 슈퍼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선수 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달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린단인데요.


100년이 조금 넘는 배드민턴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달성한 선수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다수의 배드민턴 전문가들은 아마 린단을 1번으로 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대 배드민턴의 빠르고 공격적인 플레이에 가장 정점에 있던 선수가 린단이었으며, 또한 그만이 달성할 수 있었던 수많은 배드민턴 실적이 이를 뒷받침하기 때문입니다.


랠리25에서는 선수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린단을 당분간 특집 기사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그 첫 이야기로 2008베이징올림픽 때까지의 린단의 활약상을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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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락호락하지 않았던 첫 경험, 2004아테네올림픽


린단의 여러 업적에 가려져 있지만, 린단도 올림픽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의 첫 도전이었던 2004아테네올림픽에서였는데요. 린단은 1번 시드를 받고 출전했지만 1회전(32강)에서 로날드 수실로(싱가포르)에게 패하며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2004년이면 린단 나이 22살이었는데요. 패기만으로는 다가갈 수 없었던 세계 정상이었습니다.


주니어시절부터 린단은 소위 싹수가 보인다고 표현되는 재능이 남달랐던 선수였습니다. 2001년, 고등학생 2학년 신분으로 린단은 중국 성인 대표팀에 발탁됐는데요. 당해 열렸던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 중국의 단체전 우승과 개인전 동메달 획득을 따낸 후였습니다. 대표팀 동료 바오춘라이와 함께 린단은 중국의 차세대 남자단식을 책임질 왼손잡이 원투펀치로 기대 받았죠.


린단의 상승세는 주목할 만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걸출한 공격력은 린단의 주무기였는데요. 강한 손목힘을 바탕으로 린단은 신예의 패기를 국제 무대에서 뽐내기 시작했습니다. 모모타 켄토(일본)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 20대 초반의 린단이었습니다. 꾸준히 국제 대회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린단은 올림픽에서도 1번 시드를 받으며 금메달 후보로 평가 받았으나, 결과는 1회전 탈락이었죠. 나중에 린단은 "너무 이기려고만 했다. 즐기지 못했다"라며 본인의 실패를 복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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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의 영웅으로 등극, 베이징올림픽 


아테네올림픽 금메달은 인도네시아 국민 영웅으로 등극한 타우픽 히다얏의 차지였는데요. 올림픽을 기점으로 남자단식은 새로운 세대의 선수들이 번갈아 가며 국제 무대 상위권을 접수하기 시작했습니다. 린단은 중국을 대표했고, 말레이시아에서는 리총웨이가 뜨고 있었죠. 한국에서는 이현일이, 덴마크에서는 피터 게이드가 각 국가를 대표해 우승을 노크했습니다. 군웅할거의 시대가 이때를 나타내는 적절한 표현이었습니다.


가장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타우픽이었는데요. 올림픽에 이어 타우픽은 2006도하아시안게임까지 접수했습니다. 린단과 리총웨이는 아직까지는 미완의 대기였을 뿐이었는데요. 린단과 리총웨이는 그들의 다른 두 성품으로 인해 팬들에게 기억되기 시작했습니다. 온화하고 차분한 성품의 리총웨이는 '순둥이' 이미지로 기억되는 반면, 다혈질에 심판 판정에 언제나 불만 많았던 린단은 '악동'으로 기억되고 있었죠.


린단의 악동 기질은 2008년 들어 폭발하고 마는데, 첫 사건이 한국 팬들에게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소위 '린단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2008코리아오픈 결승전 이현일과의 경기에서 선심 판정에 불만이 쌓였던 린단은, 당시 한국 대표팀 코치였던 리마오에게 라켓을 집어 던지며 육두문자를 주고 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겠다'던 린단이었는데요. 린단의 기행은 자국 내에서도 계속됐는데, 2008년 4월, 지신펭 코치에게 폭행을 가하며 하극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연이은 폭력적인 행동으로 인해 린단은 악동의 이미지가 굳어졌는데요. 당시 린단에게 어떤 수위의 징계가 내려질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으나, 의외로 린단은 이때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았습니다. 린단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실력 외적으로 올림픽 도전에 실패할 뻔 했지만 린단에게는 천운이 따랐죠.


그리고 린단은 베이징올림픽에서 가장 높은 시상대에 올랐습니다. 군웅할거 시대에 등장한 난세의 영웅이었는데요. 올림픽에서 압도적인 경기력을 펼치며 라이벌들을 소위 압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때 린단이었습니다. 악동 린단이 쟁쟁한 라이벌들을 제치고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당당히 세계에 알린 대회는 베이징올림픽이었습니다.



박성진 기자



<사진 출처 = 요넥스>

tags : #린단, #요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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