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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칼럼]half sm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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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드민턴코리아 댓글 0건 작성일 2011-04-2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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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빅터 코리아 슈퍼시리즈 대회 여자단식 결승전. 대표팀 김학균 코치에게 물었다. “성지현의 장점은 뭐예요”. 김 코치는 짧게 답했다.“하프 스매시”. 하.프.스.매.시. 뭔가 대단해 보이는 단어처럼 들렸다. 호쾌한 스매시라는 단어에 절반을 뜻하는 하프가 붙었다. 스매시를 절반만 한다니. 실제로는 70~80%의 힘으로 때리는 공격이지만 이름에는 절반이 붙었다.

성지현은 중국의 왕스셴과 결승전을 치렀다. 성지현의 스매시가 갑자기 뚝 떨어졌다. 곁에 있던 김중수 대표팀 감독은 “저게 바로 하프 스매시”라고 설명했다. 설명하는 김 감독의 입가에 슬며시 웃음이 번졌다. 성지현의 하프 스매시가 상대 코트에 떨어질 때마다 왕스셴은 자꾸 무릎을 꿇었다. 비록 경기는 0-2로 졌지만 성지현의 하프 스매시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강하게 때리는 척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힘을 빼서 깍아 때리는 공격 방법. 상대 코트 전위에 떨어뜨림으로써 상대의 움직임을 크게 만드는 효과도 가져왔다. 그 이름 ‘하프’ 처럼 절반으로 상대를 이길 수 있다면 그보다 효과적인 공격은 없을 터. 대신 힘이 떨어지기 때문에 상대가 예측할 수 있다면 쉽게 랠리의 주도권을 뺏길 위험을 지녔다. 그래서 더욱 야구의 체인지업을 닮았다. 하프 스매시를 때리는 성지현을 보며 머릿 속에 떠올렸것은 프로야구 한화의 류현진이었다. 무시무시한 체인지업을 던지는 괴물 투수. 류현진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150km짜리 직구가 아니라 그 뒤에 언제든지 날아들 수 있는 130km대의 체인지업이다. 마치 직구를 던지는 것 처럼 팔을 휘두르지만 결국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진다. 타자들은 뻔히 보이는 공에 대해서도 어쩔 수 없이 방망이를 휘두르다가 헛스윙 삼진을 당하기 일쑤다. 그래서 체인지업을 두고 타자를 바보로 만드는 악마의 공이라고 부른다. TV 중계화면에는 땅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어이없는 공으로 보이지만 타자의 눈에는 골라낼 재주가 없다. 거의 무릎을 꿇을 듯이 무너진 타격폼으로 방망이는 허공을 가른다. 직구와 똑 같은 폼으로 던지는 게 핵심 중의 핵심이다. 잔뜩 웅크린채 투수의 공을 기다리는 타자가 던지는 순간 직구가 아니라고 판단을 한다면 방망이가 나올 리 없다. 직구라고 생각하고 일찌감치 타격 동작에 시동을 걸었을 때 떨어져야 효과 만점. 그래서 체인지업은 직구를 던질 때와 팔의 스윙 스피드가 같아야 한다. 던지기 쉽지만 아무나 던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구와 달랐을 때, 그리고 체인지업이 스트라이크 존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을 때 체인지업은 가장 위험한 공이 된다. 지난해 3월 미국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 결승전. 연장 10회초 한국 대표팀의 마무리 투수 임창용은 일본의 스즈키 이치로를 상대로 볼카운트 2-3에서 9구째를 체인지업으로 선택했다. 임창용이 던진 체인지업은, 앞선 5구째 멋지게 떨어져 이치로가 간신히 파울 처리했던 때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밋밋하게 한가운데를 향했고, 결국 2타점짜리 적시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가장 위력적으로 보이는, 내 힘을 뺌으로써 상대의 허를 찌르는 체인지업은 나의 빈틈이 보였을 때 오히려 가장 위험한 공이 된다. 두산 투수 임태훈은 신인으로 입단한 직후에도 “결정적인 순간 가장 던지기 어려운 공이 체인지업”이라고 말하며 체인지업의 매력과 위험을 동시에 깨닫고 있었다.

하프 스매시는 체인지업을 지독하게 닮았다. 상대가 잔뜩 스매시를 기다리고 있을 때 때리는 절반의 공격. 상대가 예측하고 있는 ‘낙구’ 지점 한참 앞에 떨어짐으로써 순간의 판단을 흐트러뜨린다. 야구에서 투수들이 체인지업에 재미를 느끼는 것은 ‘헛스윙 삼진’이 나오기 때문. 자신이 던진 체인지업에 모든 타격폼이 무너진 채 헛스윙으로 나자빠지는 타자를 마운드에서 바라보는 것만큼 짜릿한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하프 스매시 또한 상대의 무릎을 꿇리기 일쑤다. 예측보다 일찍 떨어진 공을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뒷무릎이 꺾이며 코트에 주저앉는다. 자칫 라켓을 놓치기도 한다. 이쪽 코트에서 서서 상대가 무릎을 꿇는 일을 보는 것 만큼 짜릿한 일도 또 없다. 그래서 체인지업과 하프 스매시는 또다시 독이 된다. 살살 던지는, 살살 때리는 일에 재미가 들리다 보면 정작 제일 필요한 무언가를 잃기 십상이다.

체인지업을 효과적으로 던지는 투수에게 체인지업 보다 더 중요한 구질은 직구다. 빠르고 위력적인 직구가 있어야 타자들이 이를 의식하고, 직구처럼 들어오다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속는다. 직구가 위력적이지 않다면, 직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체인지업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사실 체인지업은 주연이 될 수 없는, 태생적인 조연이다. 직구의 곁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구종. 메이저리그 사상 최고의 커브를 지녔다던 배리 지토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적한 뒤 직구 구속이 떨어지며 커브의 위력도 함께 사라졌다. 한국 프로야구 최고 포크볼을 지녔다고 평가받던 삼성의 임동규도 직구의 위력이 약해지면서 포크볼이 평범한 공이 돼 버렸다. 배드민턴의 하프 스매시도 같은 운명을 지녔다. 강력한 스매시를 뒷받침하는 조연이 제 역할이다. 점프 대신 작은 스텝을 밟으며 비껴치는 듯한 스윙으로 공격하는 ‘특별한 방식’에 대해 제 고유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스매시’라는 이름에 기대 ‘하프’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 태생의 비밀을 드러낸다. 그래서 ‘하프 스매시’는 주무기가 될 수 없는, 서자의 신세다.

물론 하프 스매시는 위력적인 무기가 된다. 네트 너머 상대는 하프 스매시에 쉽게 무릎을 꿇는다. 한 번, 두 번. 상대는 지치고, 화나고, 이를 넘어서면 무기력해진다. 그러나 절대 잊지 말 것. 어느 순간 스매시 없이, 하프만 존재한다고 상대가 인식하는 순간, 하프 스매시는 평범한 셔틀 콕 넘기기 이상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날 경기에서 성지현은 몇 차례 멋진 하프 스매시를 성공시켰다. 김중수 감독도 빙그레 웃으며 성지현의 플레이에 만족스러워 했다. 하지만 성지현은 결국 0-2로 졌다. 체력 부족이 이유였다. 경기가 끝났을 때 성지현에게 ‘하프 스매시를 잘 하는 비결’을 물었다. 성지현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프 스매시는 자신을 세계 정상으로 이끌어주는 ‘비급’이 아니라는 점을. 성지현은 “그냥, 잘 들어가는 것 같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상대를 쉽게 이기는 방법은, 어쩌면 조금만고민하면 보일 수도 있다. 족집게 학원을 다니면, 그 순간 시험 성적이 오를 수도 있다. 남들이 10시간 공부할 때 5시간 과외를 받는 것으로 그 승부에서 잠시 이긴 것 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정통의 길을 피해, 쉽 게 돌아감으로써 목표에 빨리 도달한 듯한 기분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하프 스매시가 스매시의 이름을 빌려 사는 것처럼, 정통을 피해 돌아가는 지름길을 택하는 것은 순간의 만족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말 아름다운 꽃은, 오랜 세월 비바람을 견뎌낸 끝에 더욱 아름답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1m75의 키를 가진, 애틀랜타 올림픽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방수현보다 5cm가 더 큰, 성지현의 힘차고 멋진 스매시를 보고 싶다. 대한민국 전체가, 모든 분야에서, 하프 스매시보다 스매시를 먼저 배우고, 꿈꾸는 모습을 보고 싶다. 네트를 사이에두고 깃털 달린 셔틀콕의 방향을 겨루는 배드민턴은 가끔, 아니 꽤 자주, 세상의 비밀을 드러낸다.


이용균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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