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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칼럼] 국가대표 이용대의 성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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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드민턴코리아 댓글 0건 작성일 2011-04-2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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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이용대는 말 그대로 깜짝 스타가 됐다. 배드민턴 팬들이야 이용대를 익히 알고 있던 터였지만, 혼합복식 금메달을 결정짓던 그 순간, 카메라를 향했던 윙크 하나로 대한민국 모든 누나들의, 아니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의 마음을 빼앗아 버렸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스타가 됐다. 많은 운동 선수들이, 연예인이 그렇듯 자칫, ‘스타병’에 빠질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다. 시쳇말로, 워낙 ‘떴다’.

베이징 올림픽이 아직 끝나기 전이었다. 베이징에 차려진 각종 방송국 스튜디오에 줄기차게 불려나갔다. 국내 누나 팬들이 ‘이승기를 닮았다’고 하는 통에 툭하면 이승기의 ‘내 여자라니까’를 노래로 불러야 했다.
그 이용대 열기 속에서, 이용대를 인터뷰 하기로 했다. 기자가 들어갈 수 있는 마지막 구역인, 선수촌 국제구역이라는 곳에서였다. 대표팀 김중수 감독을 통해 약속시간을 맞췄고, 국제구역에서 이용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히 마음 한 구석에는 걱정이 자리잡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 벌써부터 배드민턴 밖 다른 일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베이징 올림픽 선수촌에서 이용대를 만나는 순간, 걱정은 기우가 됐다. 그 웃음과 윙크는 여전했다. 시골청년다운 순박한 표정도 그대로였다.

배드민턴 선수로서 가장 어려운 순간을, 가장 멋진 성적으로 극복했다. 이용대는 ‘배드민턴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면서”라고 답했다. 압박감이 컸다고 했다. “예전에는 국제 대회를 나가도 기분 좋게, 마치 놀러가는 것처럼 대회에 참가하고 그랬는데, 올림픽을 준비하면서는 분위기가 달라지더라”라고 했다. 올림픽 개막 2달을 앞두고 이용대는 “갑자기 재미로 하던 배드민턴이 뭔가 갑자기 무거워지더라”고 했다. 그 무거웠던 올림픽을 잘 견뎌냈다. 정재성과 짝을 이뤘던 남자 복식에서 일찌감치 탈락한 통에 충격에 빠질 뻔 했지만 이효정과 짝을 이룬 혼합복식에서 결국 금메달을 따냈다. 이용대는 “남자복식에 거는 기대가 모두들 너무 컸다. 모두들 도와주셔서 잘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용대는 귀 얘기를 꺼냈다. 이용대는 갑자기 기자에게 귀를 보여주더니, “제 귀가 복이 많게 생겼다는 얘기를 진짜 많이 들어요”라고 했다. “이게 돈 복이라고들 하더라구요. 전 이걸 믿고 열심히 했어요. 부처님 귀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운이 좋은 것 아닌가”라며 활짝 웃었다. 금메달에 대한 자만과 거드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실력보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스물 한 살 청년 그대로였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배드민턴이라는 종목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스물한살 청년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지만, 이용대는 “이 인기가, 나에 대한 인기가 아니라 배드민턴에 대한 인기로 잘 이어졌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내내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4년마다 올림픽 때만 관심과 인기를 모으는 핸드볼에 대한 비교도 이어졌다. 이용대는 “배드민턴 인기를 위해 일단, 많은 프로그램에 나갈 거예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도록”이라고 했다. “배드민턴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라는 농담도 곁들였다.
그렇게 이용대는 승승장구였다. 본인 스스로 밝힌 대로 큰 어려움 없는 배드민턴 인생이 계속됐다. 시작할 때부터 천부적인 자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화순실업고교 재학시절에는 적수가 없었다. 42연승을 달리기도 했다. 일찌감치 중3 때 대표팀에 뽑혀서 최연소 대표 선발 기록(종전 박주봉)도 갈아치운 터였다. 2008년 3월, 영국 버밍엄에서 열린 전영오픈에서는 정재성과 함께 남자복식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전영오픈 최연소 우승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베이징 올림픽 우승. 이용대는 탄탄대로를 달려왔다.

올림픽이 끝난 뒤에도 이용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걱정했던, 갑작스런 성취 뒤 찾아오는 허탈함에 따른 슬럼프를 겪지 않았다. 정재성의 국군체육부대 입소 훈련 때문에 잠시 파트너 교체가 있었던 것을 빼면, 나가는 대회마다 좋은 성적을 이어갔다.
2009년도 이용대는 흔들리지 않았다. 1년 동안 꾸준히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다. 조용했지만 강했다. 입소 훈련을 마친 정재성과 다시 짝을 이뤘고, 2009년 말까지 이어진 국제대회에서 4번이나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세계개인선수권대회에서 아쉽게 중국의 차이윈-푸하이펑에게 졌지만, 올해 초 열린 빅터코리아오픈 결승전에서 그대로 갚았다. 1세트를 따낸 뒤 2세트를 내줬지만, 이용대가 신기(神技)의 수비 기술로 3세트를 가져왔다. 이용대는 엎드려서도 받았고, 누워서도 상대의 공격을 받아냈다.

그러나, 2010년 첫 단추를 잘 꿴 이용대가 배드민턴 인생 첫 시련을 맞았다. 이용대는 오른쪽 팔꿈치 통증을 안은 채 빅터코리아오픈에 참가했고, 그 통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 이어 열린 말레이시아 오픈에서 남자복식 1회전 탈락을 하더니, 혼합복식에서는 2회전에서 경기를 포기해 기권패 했다. 이용대는 팔꿈치 통증이 낫지 않았고, 설상가상 발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이용대는 결국, 2월22일부터 태국 나콘라차시마에서 열리는 2010 세계남녀단체배드민턴선수권대회 아시아지역 예선 출전명단에서 빠졌다.
세계선수권 불참은 일찌감치 예정돼 있었다. 대표팀은 이미 빅터코리아오픈 결승이 열리기 전부터 이용대에게 휴식이 필요할 거라는 판단을 했다. 대표팀 관계자는 빅터코리아오픈 결승전이 열리던 날 “이용대가 말레이시아 대회가 끝난 뒤 일정 기간 휴식이 필요한 상태다”라며 “어차피 아시아 예선을 통과한 뒤 세계선수권에 나가면 된다”고 밝혔다.
운동 선수에게 부상은 숙명이다. 경쟁이 치열하고, 선수들의 수준이 계속해서 올라가는 만큼, 누가 부상을 잘 다스리고, 회복하느냐에 선수인생의 승리 여부를 가른다. 많은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부상을 견뎌내지 못했고, 승부의 뒤안길로 사라지기도 했다.

대표팀 김중수 감독은 “통증은, 그걸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재활 성공여부가 갈린다”라고 했다. 다 낫더라도, 그 통증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서 재발 여부를 두려워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된 플레이가 이뤄질 뿐만 아니라 다친 부위가 아닌 다른 부위에 무리가 가면서 또다른 부상을 낳는다. 왼쪽 무릎 부상으로 고생한 선수가 나중에 오른쪽 무릎을 또 다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2년전 베이징 올림픽 때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배드민턴을 해 왔다”고 밝혔던 이용대에게 2010년 봄은 첫 시련의 계절이 될 지도 모른다. 지난해 연말부터 연초까지 이어진 경기 일정이 ‘무리한 출전’이었다는 따가운 시선도 함께 이겨내야 한다.
빅터코리아오픈을 앞두고 이용대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팔꿈치 때문에 병원에 다녀왔다”면서도 “병원에서도 알아보시고, ‘디씨’도 좀 해주시더라구요. 이놈의 인기 관리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살찔까봐 더 운동 열심히 한다니까요”라며 웃었다. 첫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그 웃음일지도 모르겠다. 이용대는 이제 겨우 스물셋이니까.

이용균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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