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최고를 뜻하는 단어는 전부 그의 수식어로 적격이다, 김동문 교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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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드민턴코리아 댓글 0건 작성일 2024-05-30 17:12본문
‘인생의 3막을 장식하기 위한 길 위에 서다’
대한민국 배드민턴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는 남자가 있다. 김동문. 모든 부문에서 완벽에 가까운 플레이로 극찬을 받았던 선수. 한국 배드민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그는 대한민국 배드민턴 선수 중 유일하게 두 종목 *그랜드슬램 보유자이자, 3회 연속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유일한 인물이며 현재는 은퇴 후 13년째 모교인 원광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그는 대한민국 배드민턴의 찬란한 미래를 위한 더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김동문 교수는 1985년부터 2004년까지 20년의 배드민턴 선수 생활인 인생의 1막을 끝내고, 은퇴 이후 바로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고, 2011년 말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인생의 2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는 2012년부터 13년째 원광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며 더욱 빛을 발할 인생의 3막을 향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원광대학교 운동부는 총 13개 종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학교에서 교비로 육성되는 4개 종목과 전북체육회에서 지원하는 9개 종목이 있다. 육성종목으로 불리는 4개의 종목 중 하나가 바로 배드민턴이다. 300명이 좀 안 되는 체육 특기생들을 관리하고 지원하고 곳이 스포츠 지원센터이다. 김동문 교수가 그 스포츠 지원센터의 센터장을 맡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는 방학이지만 학기 중과 같이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 3개월 동안 계속해서 올림픽에서의 배드민턴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고, 그 역사를 여전히 이어가고 있는 김동문 교수의 이야기를 더욱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해 익산으로 달려갔다. 익산 원광대학교에 있는 김동문 교수의 배드민턴 인생이 가득 담긴 집무실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주목받지 못했던 유소년 시기
▶ 가정형편 때문에 선택한 진로
김동문 교수는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느끼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집이 어렵다 보니 다른 형제지간들도 독립이 빨랐다. 아주 어린 시절 적부터 그에게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은 어머니는 리어카를 끌고 시장에 가서 장사를 하고, 형들이 아침에 리어카를 시장에 끌어다 주고 가고 그는 그것을 붙들고 따라다녔다. 어머니 혼자 6남매를 키우려다 보니 형편이 점점 더 어려워져서 6살 때 전남 곡성에서 전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국가에서 정부미와 라면 등 생필품을 지원받으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어릴 적부터 TV에서 나오는 운동선수들을 동경했다. tv로 보는 운동선수들은 챔피언이 되기만 하면 생활환경이 확연히 바뀌는 모습을 보며 막연히 그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1986년과 1988년에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되고 초등학교 입학 이전부터 어려운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운동선수로 성공하고 나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됐고 올림픽에 출전해서 돈을 많이 벌어 가정형편을 나아지게 하고 싶었다. 학교에 야구, 배드민턴, 육상부가 있던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tags : #원광대학교 스포츠지원센터 센터장, #배드민턴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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