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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최고를 뜻하는 단어는 전부 그의 수식어로 적격이다, 김동문 교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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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드민턴코리아 댓글 0건 작성일 2024-09-26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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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각을 나타낸 고등학교 시기


짧은 주니어 국가대표와 국가대표의 시작

고등학교 1학년 겨울, 주니어국가대표가 된 김동문 교수는 그 때부터 공식적인 훈련에 처음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 다음 해 여름. 주니어세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처음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돌아온 김동문 교수는 귀국하고 얼마 후 국가대표 선발전을 뛰게 됐고, 단식부문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국가대표로 선발되면서 다른 선수들에 비해 짧게 주니어국가대표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김동문 교수는 고등학교까지 복식 선수였지만 국가대표에서의 생활은 단식 선수로 시작을 하게 되었다. 지금과는 국가대표 선발 방식이 달랐지만, 그때 김동문 교수가 단식으로 4강 안에 들며 단식 선수로 발탁이 된 것이었다. 그 당시 단식 선수로는 현 국가대표팀 김학균 감독, 현 인천국제공항공사 스카이몬스 안재창 감독, 현 국군체육부대 이광진 감독이 단식을 주도하던 선수들이었다. 그 선배들의 뒤를 이을 선수로 주목을 받으며 막내로 김동문 교수가 국가대표에 입성을 하게 된 것이다.

 

김동문 교수는 대표팀을 지도하고 있던 외국 코치에게서 중국 스타일의 기술 및 동작들을 배우며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단식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막 국가대표가 되었으니 대표팀 내에서 꿈나무로 불리던 김동문 교수는 첫 해에 바로 외국 시합도 나가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껏 복식 전문선수에 가까웠고, 고등학생이 단식경기에 출전해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1, 2회전도 쉽게 통과하지 못한 그는 성적이 나오지 않자 대회 출전보다는 훈련에만 몰두해야 했다. 그 당시 여자 단식 선수들의 소위 스파링 상대가 되었던 김동문 교수는 방수현 선수와 지금의 아내인 나경민 교수 그리고 이흥순(언주중)코치 등 여자 선배들을 상대로 스파링 경기를 많이 뛰게 되었다. 국가대표팀 내에서 2년 정도 단식 훈련을 받았던 김동문 교수는 그때 배웠던 단식 기술들과 움직임들이 혼합복식을 하는 데 있어서 비슷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굉장히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단식을 하던 선수에게 혼합복식을 뛰게하면 스텝이나 스트로크가 비슷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복식만 하던 선수들과의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현재 국가대표인 서승재 선수도 단식 선수였다고.

 

단기간에 변화가 많이 찾아온 김동문 교수는 같이 운동을 하던 친구들보다 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보자면 제일 늦었다고 생각한 김동문 교수이지만, 키가 갑자기 10cm씩 크다 보니 타점이 높아지고 힘이 붙어서 어렸을 때와는 반대의 상황들이 생긴 것이다. 그 상태로 대표팀에 들어온 김동문 교수는 신인 시절에 단식 선수였던 경험이 도움이 많이 되면서 국내대회에서 단식, 복식, 혼합복식 모든 면에서 가릴 곳 없이 정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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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생활과 함께 시작된 대학교 시기

 

원광대학교 그 전설의 시작!

현재도 자신의 모교인 원광대학교 스포츠과학부의 교수로 있는 그가 원광대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친구들과의 우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성장해 온 고향이면서 배드민턴의 메카로 잘 알려진 전라북도를 떠나고 싶지 않았고, 어릴 적부터 생각해 온 엘리트 코스가 바로 원광대학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광대학교는 당시 감독이 없는 상태였고 팀이 제대로 운영이 되고 있지 않아 당시 대학 1, 2학년 선배들이 운동을 그만두려는 상황이였다. 김동문 교수와 그 친구들이 원광대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면 배드민턴팀이 유지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배드민턴팀의 전통이 사라지게 되는 셈이었다.

 

그래서 김동문 교수는 주도적으로 나서서 흩어지는 것보다 다 같이 같은 학교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며 친구들을 설득했다. 이미 친구들과는 말을 맞추고 난 뒤였고,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각자의 생각을 솔직하게 감독님과 부모님들에게 전달을 했다. 의견을 종합해 본 결과, 결국 원광대가 그들의 최종 선택이였고, 그렇게 김동문 교수의 원광대 생활이 시작되었다.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누리고 싶은 로망이 있었지만 이미 김동문 교수, 하태권 감독, 황선호 감독, 이덕준 감독 모두 국가대표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대학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선배들도 없이 바로 고참이 된 그들은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다른 종목 친구들에 비해 많은 자유를 누리긴 했다. 지도자가 없이 대학 선수 생활을 했던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도 김동문 교수와 친구들은 2학년이 되고 나서부터는 전국대회를 휩쓸고 다니며 화려한 대학 시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6편에서 이어집니다. 

tags : #김동문, #원광대학교 스포츠지원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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